행 서 ( 行 書 )

  • 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했으리라 짐작된다.
  • 엄격히 구분 한다면 행서의 근원은 초서(草書)이다. 다만 초서는 자체(字體)가 너무 간략한 탓으로 판독하기가 힘든 험이 있어 이런 결점을 보안하기 위해 예서의 형태에 근접시켜 놓은 것이 행서였던 것이다.
  •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해서,행서,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난 정 서 ( 蘭 亭 序 )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라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집 자 성 교 서 ( 集 字 聖 敎 序 )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닙자성교서는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 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 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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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부비디바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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