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서 (隸 書)

  • 전서는 대칭을 맞추어야 하고 곡선이기 때문에 쓰기가 불편하다. 그리하여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고 원필도 방필로 많이 바꾸고, 필획도 줄여서 쉽게 쓰게 한것이 예서(隸書)이다.
  • 기록을 보면 예서는 정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한다.
  •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徒隸)라 하였는데 장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 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型), 장천비와 같은 방정형(方整型), 하승비(夏承碑) 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된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을 영 비 ( 乙 瑛 碑 )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예 기 비(禮 器 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 년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한래비 라고도 부른다.

이 비문의 내용은 노나 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 등,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 자묘(이곳은 한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 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즉 예기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묘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느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경(단단함),청(맑음),정(곧음)이 언급되 어진다.

즉, 예기비는 선조가 여위어 신정(神情)이 넘치며 단단해서 골격이 튼튼하고 맑아서 모습이 명랑하며 곧아서 태도가 준수하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예기비에 대한 감상은 필획의 선조를 통해 그 신정과 골격,모양,자태를 터득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 다.

사 신 비 (史 晨 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재 산동성 곡부{공자묘의 비림(碑林)}에 있다.

이 비는 전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후면을 사신 후비라 칭한다. 사신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 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아울러 상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이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 성대한 정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있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서 협 송 ( 西 狹 頌 )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사각형의 결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 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으며 장천비에서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크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름한 붓놀림은 모든 한비 가 운데 단연 돋보인다.

조 전 비( 曺 全 碑 )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그전에 이 비는 한비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으나, 20C 영국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한인들의 진적(眞蹟)을 발견함으로써,조전의 우려한 서풍이 한말의 퇴폐한 풍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과 이 비의 자형이나 필화의 모양새는 예법이 완성된 극치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비의 서법은 300년간의 정칙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진적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면할 길이 없다. 또 하나 조전 비의 단정한 모습에서 결체나 용필의 비밀을 엿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단장하면서도 아리땁고 중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 모와 중심 밀집과 좌우서전(左右舒展)의 결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비는 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치보(致寶)라 일컬어 지고 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상황증거를 추리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년 10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해 9월 삼공,즉 최고 권력자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시에 그 참모격이던 간의 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에 속해 있었던 것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장 천 비 ( 張 遷 碑 )

장천비는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方模)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그러나 그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고 힘찬 점획,완강한 네모꼴의 구성,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충분히 뻗은 점획,자유롭고 메이지 않은 결체에 그 참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중 방필 웅강(方筆雄强)의 전형으로도 일컬어진다.

후한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체를 보이고 있어서 ,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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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부비디바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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